카이사르 이전 로마 최고의 장군. 동방을 정복했지만 내전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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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여정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이탈리아 동부 피케눔의 부유하고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는 성공적인 군사 지휘관이자 집정관으로 젊은 폼페이우스에게 그의 부상에 결정적인 자원과 인맥을 제공했다.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국들에 대한 동맹시 전쟁 중 아버지 아래에서 복무하며 군사 교육을 받았다. 군대를 지휘하고 군사 전략을 이해하는 이 초기 경험은 그의 미래 정복과 로마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으로서의 명성의 기초를 놓았다.
겨우 23세에 폼페이우스는 술라의 로마 진군을 지원하기 위해 가문의 피보호민과 퇴역병들로부터 3개 군단을 조직하는 놀라운 주도력을 보여주었다. 공적 전쟁을 위해 사적 자원을 사용한 이 대담한 행동은 위험한 선례를 세웠고 술라가 그를 임페라토르로 맞이할 만큼 감명을 주었다.
폼페이우스는 시칠리아에서 남은 마리우스파를 신속히 격파하고 아프리카까지 추격하여 그들의 마지막 거점을 전멸시켰다. 그의 압도적인 성공으로 술라는 그에게 개선식과 마그누스(위대한)라는 칭호를 수여했는데 폼페이우스는 기술적으로 아직 그러한 영예를 받기에는 너무 어렸다.
폼페이우스는 독립적인 로마 국가를 세운 반란 장군 세르토리우스를 격파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파견되었다. 수년간의 어려운 전쟁 끝에 폼페이우스는 마침내 승리하여 그의 끈기와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장기 캠페인을 수행하는 능력을 입증했다.
스페인에서 군대와 함께 돌아온 폼페이우스는 스파르타쿠스 반란에서 도망치는 5,000명의 노예를 가로막아 전멸시켰다. 크라수스가 주요 전투를 했지만 폼페이우스는 반란 종식의 공을 주장하여 수십 년간 로마 정치를 형성할 쓰라린 경쟁을 만들었다.
폼페이우스는 필요한 하위 관직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경쟁자 크라수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들은 함께 술라가 축소한 호민관의 권한을 회복했는데 이는 폼페이우스의 민중의 옹호자로서의 명성을 더욱 높인 인기 있는 조치였다.
전체 지중해에 대한 특별 지휘권을 부여받은 폼페이우스는 단 3개월 만에 체계적으로 해적을 제거했는데 이는 수십 년간 로마가 이루지 못한 업적이었다. 바다를 구역으로 나누고 부하 지휘관들을 배치한 그의 효율적인 조직은 미래 군사 작전의 모델이 되었다.
폼페이우스는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 왕을 격파하고 전체 동지중해를 재편하여 새로운 속주를 만들고 피보호 왕국을 세우며 로마의 연간 수입을 거의 두 배로 늘렸다. 그의 동방 정착은 여러 세대 동안 그곳에서 로마 행정의 기초로 남았다.
그의 동방 정착과 퇴역병을 위한 토지에 대한 원로원의 반대에 좌절한 폼페이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크라수스와 비공식적인 권력 분담 협정을 맺었다. 이 제1차 삼두정치는 로마 정치를 지배하고 사실상 전통적인 공화정 체제를 종식시켰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사랑하는 딸 율리아와 결혼하여 두 사람 사이의 정치적 동맹을 공고히 했다. 결혼은 진정으로 행복했고 기원전 54년 율리아가 출산 중 사망하면서 야심찬 장군들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 중요한 개인적 유대가 사라졌다.
삼두정치는 루카 회의에서 갱신되었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다시 집정관으로 봉사했다. 폼페이우스는 스페인을 속주로 받았지만 로마 근처에 머물면서 부관들을 통해 통치했는데 이는 그의 손에 위험한 군사력을 집중시키는 조치였다.
클로디우스 살해 후 정치적 폭력이 로마를 마비시키자 폼페이우스는 단독 집정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독재에 가까운 전례 없는 지위였다. 그는 질서를 회복하고 선거 부패에 대한 법률을 통과시키면서 카이사르에 대항하여 보수적인 원로원과 점점 더 연합했다.
카이사르가 군대와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넜을 때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은 충분한 병력을 신속히 동원할 수 없어 로마를 떠났다. 이탈리아를 포기하고 그리스에서 병력을 구축하려는 폼페이우스의 결정은 전략적으로는 타당했지만 그의 위신과 리더십에 정치적으로 해로웠다.
카이사르의 군대보다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폼페이우스는 기병대가 패주하고 보병이 노출되면서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패배는 그의 군대와 명성을 산산조각 내어 전쟁을 계속할 동맹과 자원을 찾아 동쪽으로 도망치게 했다.
이집트에서 피난처를 찾던 폼페이우스는 승리한 카이사르의 환심을 사려던 어린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고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는 해안에 발을 디딜 때 칼에 찔렸고 그의 머리는 카이사르에게 바치기 위해 보존되었는데 카이사르는 전해지기를 전 동맹이자 사위의 모습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