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마리 루이즈의 아들. 로마 왕으로 태어났지만 오스트리아 왕자로 자랐고, 물려받기로 되어 있던 제국을 통치하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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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여정
1811년 3월 20일, 나폴레옹 프랑수아 샤를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튀일리 궁전에서 태어났다. 파리 전역에서 101발의 축포가 울렸다. 즉시 로마 왕 칭호가 주어져 아버지 제국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나타냈다. 겸자가 필요한 어려운 출산이었다.
1811년 6월 9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화려한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대부모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외할아버지)와 마담 메르(나폴레옹의 어머니)였다. 이 의식은 나폴레옹 제국 영광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나폴레옹은 운명적인 러시아 원정을 떠나며 어린 아들을 남겨두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는 그 후 아버지를 몇 번밖에 보지 못했다. 이 재앙적인 원정은 어린 로마 왕이 물려받기로 되어 있던 제국의 붕괴를 알리는 시작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제6차 대불동맹과의 전쟁 사이에 어린 아들과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이것은 그들의 마지막 순간 중 하나였다. 황제는 아들과 놀며 결코 실현되지 않을 미래에 대한 희망을 표현했다고 전해진다.
1814년 4월 6일 나폴레옹이 퇴위할 때 아들에게 제위를 양위하여 3살짜리 아이를 잠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2세로 만들었다. 그러나 동맹국들은 이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고 부르봉 왕조가 복위되었다.
마리 루이즈는 아들을 오스트리아로 데려갔다. 표면적으로는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는 평생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했다. 외할아버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는 그들을 환영했지만, 소년은 이제 축하받을 후계자가 아니라 관리해야 할 정치적 골칫거리가 되었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다시 아들을 후계자로 선포했다. 워털루 이후 다시 나폴레옹 2세에게 양위했다. 오스트리아에 억류된 아이는 이러한 사건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동맹국들은 다시 승인을 거부했다.
오스트리아 당국은 공식적으로 소년의 프랑스 칭호와 신분을 박탈했다. 그는 프란츠로 개명되었고 라이히슈타트 공작이라는 작은 오스트리아 작위를 받았다. 나폴레옹 유산이 억압된 채 오스트리아 왕자로 양육되었다.
1821년 5월 5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사망했다. 10살의 프란츠는 복잡한 감정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지만, 그의 존재 전체가 나폴레옹의 아들이라는 사실로 정의되었다. 보나파르티스트의 희망은 이제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 있었다.
프란츠는 정규 군사 훈련을 시작하여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전술, 전략, 군사 역사를 열정적으로 공부했다. 오스트리아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아버지의 전역에 대해 읽으며 나폴레옹 전쟁에 대한 깊은 매력을 키웠다.
성장하면서 프란츠는 자신의 독특한 위치를 점점 더 인식하게 되었다. 보나파르티스트 요원들이 때때로 접촉하여 아버지의 왕좌를 되찾으려는 꿈을 부추겼다. 메테르니히의 감시 하에서 오스트리아에 대한 충성과 프랑스 유산 사이에서 신중하게 균형을 잡았다.
프란츠는 오스트리아군에 임관하여 결국 소령 계급에 올랐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열정으로 군 복무에 전념했다. 상관들은 그의 타고난 지도력과 예리한 전술적 두뇌를 주목했다.
7월 혁명이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를 전복시키며 보나파르티스트의 희망이 높아졌다. 나폴레옹 2세를 프랑스 왕위에 앉히자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메테르니히는 그를 오스트리아에 붙잡아 두었다. 프란츠는 기회가 사라지고 왕위가 루이 필리프에게 넘어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프란츠는 결핵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삼촌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의 목숨도 앗아갈 병이었다. 건강이 악화되어도 결연하게 군 복무와 공부를 계속했다.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을 감지한 듯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였다.
프란츠는 프란츠 카를 대공의 아내 조피 대공비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그들의 관계는 로맨스 소문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진정한 성격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조피는 나중에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어머니가 되었고, 프란츠 요제프는 프란츠가 거부당한 제국을 통치하게 된다.
1832년 초까지 프란츠의 결핵은 심하게 진행되었다. 쇤브룬 궁전으로 옮겨져 오스트리아 황실이 돌보았다. 용감하게 죽음에 직면했으며, 아버지의 이름에 합당함을 증명할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랐다고 전해진다.
1832년 7월 22일, 나폴레옹 2세는 쇤브룬 궁전에서 사망했다. 겨우 21세였다. 빈의 황실 납골당에 안장되었다. 1940년 유해는 파리 앵발리드로 이장되어 현재 아버지 곁에 잠들어 있다. '어린 독수리'는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