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프랑스를 영원히 바꾼 혁명적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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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여정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는 프로방스 지역의 프레쥐에서 우편국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미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랑스 혁명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이론가 중 한 명이 되었다.
시에예스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의 술피시오 신학교에 입학했다. 교회는 그와 같은 신분의 사람이 사회 계층을 상승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경로 중 하나였다.
시에예스는 가톨릭 사제로 서품되었으나, 그는 특별히 종교적이지 않았다. 그는 사제직을 영적 소명보다는 직업 경로로 간주했다.
시에예스는 트레기에 주교의 비서로 교회 업무의 행정 경험을 쌓으며 교회 경력을 시작했다.
시에예스는 샤르트르 대성당의 참사회원으로 임명되어 재정적 안정과 철학 연구를 추구할 여유를 얻게 되었다.
시에예스는 교구의 두 번째 최고 직책인 부주교장 직위로 승진하여 행정 능력을 입증했다.
시에예스는 귀족 특권을 공격하는 첫 번째 주요 정치 저작을 출판했으며, 귀족의 면제가 국가에 해를 끼친다고 주장했다.
시에예스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라고 묻는 혁명적 팜플렛을 출판했다. 이 저작은 혁명 운동의 선언문이 되었다.
시에예스는 제3신분의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어 헌법 개혁을 위한 주도적인 목소리가 되었다.
시에예스는 제3신분이 국민의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으며, 이는 삼부회를 혁명적 기구로 변모시킨 중추적 순간이었다.
시에예스는 프랑스 교회를 재편성하고 국가에 종속시킨 성직자 시민헌장 초안 작성에 기여했다.
공포의 시대 동안 시에예스는 단두대를 피하기 위해 낮은 프로필을 유지했다. 나중에 공포의 시대에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유명하게 '나는 살아남았다'고 대답했다.
로베스피에르의 실각 이후, 시에예스는 정치 활동으로 복귀하여 국민공회와 나중에는 500인 평의회에서 활동했다.
시에예스는 프랑스를 통치하는 5명의 집행관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즉시 자신이 주도하는 불안정한 체제에 반대하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시에예스는 집행관 체제를 타도한 쿠데타를 계획했으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협력했다. 그는 새로운 헌법에서 자신이 지배적인 인물이 되기를 희망했다.
시에예스는 나폴레옹과 함께 임시 집정관으로 잠시 근무했으나,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자신의 손에 집중시키면서 빠르게 소외되었다.
나폴레옹의 몰락과 부르봉 왕정 복고 이후, 시에예스는 1793년 루이 16세의 처형에 투표했다는 이유로 망명을 강요받았다. 그는 14년 동안 살게 될 브뤼셀에 정착했으며, 이는 한때 혁명 프랑스를 형성했던 인물로서는 조용한 말년이었다.
시에예스는 88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사망했으며, 혁명, 나폴레옹의 제국, 그리고 왕정 복고를 모두 견뎌냈다. 그의 이론적 저작들은 헌법 사상에서 계속 영향력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