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사도": 박해자에서 기독교 최고의 전도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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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여정
사울은 서기 5년경 길리기아의 주요 도시 다소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자였으며, 이 특권은 그의 후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해졌다. 그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의 경건한 유대인이었으며, 그는 바리새인의 전통을 엄격히 준수하며 자랐다.
어린 사울은 다소에서 정식 종교 교육을 시작하여 히브리 성경과 유대 율법을 공부했다. 바리새인의 아들로서 그는 어릴 때부터 토라와 장로들의 구전 전통을 엄격히 준수하는 데 몰두했다.
사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당시 가장 존경받는 랍비 중 한 명인 가말리엘 밑에서 공부했다. 가말리엘의 가르침 아래 그는 모세 율법에 대한 철저한 훈련을 받았고, 후에 그의 사역에 도움이 될 수사학적 기술을 발전시켰다.
사울은 바리새파의 정식 회원이 되어 유대 율법의 엄격한 해석과 준수에 헌신했다. 그는 열정과 지식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서 떠오르는 인물로 인정받았다.
사울은 최초의 기독교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하며 그의 죽음에 찬성하고 돌을 던지는 자들의 옷을 지켰다. 이 사건은 그의 초대 기독교회 적극적 박해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 사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환상을 경험하며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묻는 소리를 들었다. 이 극적인 만남은 그를 박해자에서 사도로 변화시켰고,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순간이 되었다.
회심하고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은 후, 사울은 즉시 다마스커스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의 변화는 그가 이전에 신자들을 박해했던 것을 아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울, 이제 바울로 불리는 그는 바나바와 함께 첫 번째 선교 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키프로스와 소아시아를 여행하며 교회를 세우고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 여행은 그의 미래 선교의 패턴을 확립했다.
바울은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했다. 이 중요한 모임에서 이방인 개종자들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유대 율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결정되었다. 이 결정은 기독교가 유대교를 넘어 확산되는 데 매우 중요했다.
바울은 이번에는 실라와 함께 두 번째 선교 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소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들어가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에 교회를 세웠다. 이로써 기독교는 유럽 대륙으로 퍼졌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써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열정적으로 옹호했다. 이 서신은 기독교 신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특히 수 세기 후 종교개혁에 영향을 미쳤다.
바울은 세 번째 선교 여행을 떠나 에베소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며 그곳에 강력한 기독교 공동체를 세웠다. 그의 가르침은 아르테미스 신전의 우상을 만드는 은장이들 사이에서 소요를 일으켰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서신을 써서 교회 내 분열을 다루고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지침을 제공했다. 이 서신에는 유명한 사랑의 장과 부활에 관한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다.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썼는데,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 대한 그의 가장 체계적인 설명이다. 이 서신은 아마도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 문서가 되어 수 세기의 사상을 형성했다.
바울은 이방인을 성전에 데려왔다는 혐의로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다. 군중이 그를 죽이려 했지만 로마 군인들이 개입했다. 그는 보호 구금되었고, 수년간의 투옥이 시작되었다.
가이사랴에서 2년간 투옥된 후, 바울은 로마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여 로마의 황제에게 사건을 상소했다. 이 결정은 그를 제국의 심장부와 그의 최종 운명으로 이끌게 되었다.
몰타에서의 난파를 포함한 험난한 항해 끝에 바울은 마침내 로마에 도착했다. 가택연금 상태였지만 방문객을 맞이할 수 있었고, 찾아오는 모든 이에게 복음을 계속 전했다.
네로의 기독교인 박해 중에 바울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로마 시민으로서 그는 십자가형 대신 참수형의 자비를 받았다. 로마 근처에서의 그의 순교는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에서 세계 종교로 변화시킨 삶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