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팅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파라오

채팅 시작

AI 성격

간략 정보

클레오파트라 7세와의 공동 통치
알렉산드리아 전쟁
나일강에서의 최후

누이이자 아내인 클레오파트라와의 권력 투쟁과 로마 내전에 치명적으로 연루된 짧은 치세를 보낸 젊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

대화 시작하기

인생 여정

62 BC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자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 어머니는 아마도 클레오파트라 5세 트리파이나. 궁정의 음모와 로마의 이집트에 대한 영향이 소용돌이치는 세계에서 태어났다.

59 BC아버지가 이집트에서 추방됨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민중 봉기로 이집트에서 쫓겨났다. 어린 왕자는 프톨레마이오스 통치의 불안정성과 민중의 지지를 잃는 위험을 직접 목격했으며, 이는 미래의 통치에 영향을 미쳤다.

55 BC아버지가 로마의 지원으로 복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이끄는 로마 군의 지원으로 왕위에 복귀했다. 젊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로마의 힘과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의 로마 의존성을 직접 배웠다.

51 BC파라오이자 공동 통치자가 됨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사망으로 젊은 왕자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되어 이집트 왕실의 전통에 따라 누이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했다. 둘은 공동 통치자가 되었지만, 실권은 궁정 고문들이 쥐고 있었다.

51 BC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

왕가의 혈통을 보존하기 위한 남매 결혼이라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전통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열여덟 살의 누이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에도 불구하고 남매는 단독 권력을 위한 경쟁자가 되었다.

50 BC권력 투쟁 시작

각자가 단독 통치를 추구하면서 젊은 왕과 누이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고문들, 특히 환관 포티노스와 장군 아킬라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단독 권력 장악 시도에 맞서 그를 지지했다.

49 BC클레오파트라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

고문들의 지원으로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클레오파트라를 알렉산드리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군대를 모으기 위해 시리아로 도망쳤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수도와 국고의 지배권을 유지했다.

49 BC단독 통치 확립

잠시 동안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고문 회의와 함께 이집트를 단독으로 통치했다. 그러나 그의 젊음 때문에 실권은 포티노스, 아킬라스, 수사학자 테오도토스가 행사했다.

48 BC클레오파트라와의 내전

클레오파트라는 용병 군대를 이끌고 동생에게 도전하기 위해 돌아왔다. 남매의 군대는 이집트 동부 국경의 펠루시움에서 대치했고, 내전은 결정적인 국면에 접어들었다.

48 BC폼페이우스의 도착과 죽음

파르살루스에서의 패배 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는 피난처를 찾아 이집트로 도망쳤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고문들은 카이사르의 환심을 사려고 폼페이우스를 암살했고, 카이사르가 도착했을 때 그의 머리를 바쳤다.

48 BC율리우스 카이사르 도착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폼페이우스의 살해에 기뻐하기는커녕 혐오감을 표했다고 전해지며, 로마에 대한 채무 상환을 요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 모두를 소환했다.

48 BC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의 비밀 만남

클레오파트라는 유명하게도 카펫에 말려서 카이사르의 방으로 몰래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로마의 독재자를 매료시켜 그의 연인이자 동맹자가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누이의 외교술에 당했음을 깨달았다.

48 BC알렉산드리아 전쟁 발발

카이사르가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공동 통치를 지지한다고 발표하자, 젊은 왕의 고문들은 민중 봉기를 선동했다. 알렉산드리아 전쟁이 시작되어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왕궁 지구에 포위되었다.

48 BC왕궁 포위

아킬라스 장군이 이끄는 이집트 군은 왕궁과 항구 지역에 있는 카이사르의 소수 병력을 포위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처음에 카이사르에게 억류되었지만, 평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어 나중에 풀려나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47 BC이집트 군 지휘

평화 협상을 위해 카이사르에게 풀려난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대신 이집트 군의 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장군들을 통제하지 못했고, 카이사르의 규율 잡힌 군대에 맞서 효과적인 전략을 세우지 못했다.

47 BC나일강 전투

카이사르는 지원군을 받아 나일강 근처에서 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에서 이집트 군을 격파했다. 이집트 군은 패주했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후퇴하는 군대와 함께 강을 건너 도망치려 했다.

47 BC나일강에서 익사

혼란스러운 후퇴 중에 도망치는 병사들의 무게로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배가 전복되었다. 젊은 파라오는 익사했고, 약 15세의 나이에 짧고 파란만장한 통치를 마감했다.

47 BC유산과 그 후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시신을 수습하여 왕족으로서 명예로운 장례를 치렀다. 클레오파트라는 단독 통치자가 되어 나중에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결혼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통치는 젊음, 조종, 로마 개입에 대한 경고의 이야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