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소 총리. 피트는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영국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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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여정
윌리엄 피트는 유력한 정치가인 채텀 백작 윌리엄 피트(대 피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귀족 혈통과 정치적 유산은 영국 최연소 총리가 되는 운명을 형성했다.
건강이 약했던 어린 피트는 가정교사에게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그의 고전 교육을 감독하며 뛰어난 연설 기술과 깊은 정치철학 지식을 심어주었다.
피트는 불과 14세에 펨브로크 칼리지에 입학했다. 고전학, 수학, 정치철학을 공부하며 어린 나이에도 뛰어난 지적 능력을 보여주었다.
피트는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링컨스 인에 입학했지만 변호사로 활동한 적은 없었다. 이 법률 교육은 의회 경력과 헌법 문제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피트는 가문의 연줄을 통해 애플비 선거구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첫 연설에서 그의 뛰어난 웅변력이 드러났고, 에드먼드 버크는 그를 의회 역사상 가장 훌륭한 연설가 중 한 명으로 칭찬했다.
피트의 미국 독립전쟁에 관한 첫 연설은 하원을 놀라게 했다. 아버지의 숙적이었던 노스 경은 그가 원목의 조각이 아니라 원목 자체라고 평했다.
불과 23세에 피트는 셸번 경 내각에서 재무장관이 되었다. 임기는 짧았지만 뛰어난 재정 능력과 행정 수완을 보여주었다.
24세에 피트는 영국 최연소 총리가 되었다. 처음에는 크리스마스 전에 끝날 '민스파이 정부'로 조롱받았지만, 17년간 재임하며 영국 정치를 개혁했다.
피트는 총선을 실시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정치적 우위를 확립했다. 이 승리는 수십 년간 지속될 토리당 지배의 시작을 알렸다.
피트는 관세를 낮추고 자유무역을 촉진하는 프랑스와의 통상 협정인 에덴 조약을 협상했다. 이 획기적인 조약은 경제 자유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을 보여주었다.
조지 3세가 정신이상을 일으켰을 때, 피트는 헌법 위기를 능숙하게 처리했다. 그가 제안한 섭정법은 웨일스 공의 권한을 제한하고 내각과 헌법의 안정을 지켰다.
프랑스 혁명의 과격한 행동 이후, 피트는 혁명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조직하고 20년간의 프랑스 팽창주의에 대한 투쟁을 시작했다.
전쟁 비용으로 인한 금융 위기에 직면하여, 피트는 잉글랜드 은행이 지폐를 금으로 교환하는 의무를 정지시켰다. 이 논쟁적 조치는 경제를 안정시키고 지속적인 전쟁 노력에 자금을 제공했다.
피트는 아일랜드와 영국 의회를 통합하는 연합법 통과를 이끌어냈다. 이후 가톨릭 해방을 시행하려 했으나, 조지 3세의 반대로 결국 사임해야 했다.
피트는 가톨릭 해방 문제로 사임했다. 조지 3세가 이 정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종교적 평등에 대한 원칙적 입장은 정치적 대가에도 불구하고 개혁에 대한 헌신을 보여주었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이 격화되자 피트가 복귀했다. 질병과 알코올로 몸이 쇠약해졌지만,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조직하고 영국을 지키는 평생의 사업을 계속했다.
이 해는 승리와 절망을 가져왔다. 넬슨의 트라팔가르 승리는 영국의 해상 패권을 확보했지만, 아우스터리츠에서 나폴레옹이 영국 동맹국들을 격파한 것은 피트의 동맹과 건강을 무너뜨렸다.
피트는 수십 년의 봉사로 기력이 소진되어 46세에 사망했다. 전해지는 마지막 말 '오 나의 조국이여, 내가 조국을 이렇게 떠나다니'는 평생의 영국에 대한 헌신을 담고 있었다. 의회는 그의 부채를 갚기 위해 4만 파운드를 의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