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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의 성 마르티노

투르의 성 마르티노

로마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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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성격

간략 정보

갈리아 최초의 수도원 창설
서유럽 수도운동 추진
외투 기적 전설

인생 여정

316판노니아 사바리아에서 출생

마르티누스는 판노니아(현대 헝가리 솜버트헤이)의 로마 주둔지 사바리아에서 이교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 군대에서 승진한 군사 호민관이었다. 군인 가정으로서 그들은 곧 북이탈리아의 파비아로 이주했고, 마르티누스는 쇠퇴하는 로마 제국 시대에 그곳에서 어린 시절 대부분을 보냈다.

326예비 신자가 되다

어린 마르티누스는 부모의 뜻에 반하여 기독교에 끌려 열 살에 스스로 예비 신자로 등록했다. 그는 사막 은둔자와 순교자들의 이야기에 매료되었고, 광야로 도망쳐 금욕자로 살 것까지 생각했다. 열렬한 이교도였던 아버지는 아들의 종교적 성향을 강하게 반대했다.

331로마 기병대에 징집되다

열다섯 살에 마르티누스는 제국 법령에 따라 아버지를 따라 군복무를 해야 했다. 그는 로마 군대에서 가장 명예로운 부대 중 하나인 정예 기병 근위대에 배속되었다. 군사적 의무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인보다는 수도사처럼 살았으며, 하인 한 명만 두고 그를 동등하게 대하며 종종 직접 시중들었다고 한다.

334갈리아에 주둔하다

마르티누스의 부대는 갈리아로 이동하여 아미앵 주둔지에서 복무했다. 그의 친절함과 자선으로 동료 병사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아졌다. 그는 군봉급의 대부분을 가난한 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하고 기본 필수품만 남겨두었다. 그의 검소한 생활 방식은 전형적인 로마 기병의 행동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337아미앵의 외투

혹독한 겨울 동안 마르티누스는 아미앵 성문에서 거의 벌거벗은 거지를 만났다. 이미 모든 돈을 다 주어버린 그는 검을 뽑아 군용 외투를 반으로 잘라 얼어붙은 사람에게 절반을 주었다. 그날 밤 그리스도가 그 반쪽 외투를 입고 마르티누스의 꿈에 나타나 그의 자선 행위의 깊은 의미를 확인해 주었다.

338기독교로 세례받다

그리스도의 환상을 본 후 마르티누스는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앙에 완전히 헌신했다. 복무 의무를 다하기 위해 2년 더 군에 남았지만, 그의 마음은 완전히 하느님께 바쳐졌다. 그는 군인-수도사로 살면서 비범한 품성으로 지휘관과 일반 병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340보름스에서 전투 거부

침입한 게르만 부족과의 전투 전에 마르티누스는 율리아누스 황제에게 양심상 더 이상 싸울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군인이며 무장하지 않고 적진 앞에 서겠다고 선언했다. 비겁하다는 혐의로 투옥되었지만 적이 예상치 못하게 평화를 구했고, 마르티누스는 군에서 제대했다.

341힐라리우스의 제자가 되다

마르티누스는 푸아티에로 가서 서방 제국에서 가장 학식 있는 교회 인사 중 한 명인 힐라리우스 주교 밑에서 공부했다. 힐라리우스는 마르티누스의 비범한 영적 은사를 인식하고 부제로 서품하려 했지만, 마르티누스는 겸손하게 구마사라는 작은 직무만 받아들였다. 그들의 우정은 서방 수도원주의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344가족을 개종시키러 귀향하다

마르티누스는 이교도 부모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판노니아로 돌아갔다. 끈질긴 노력 끝에 어머니를 개종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아버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 기간에 산길에서 도적들에게 습격당했지만, 그의 차분한 태도와 믿음으로 포획자 중 한 명이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전해진다.

356유배와 박해

아리우스파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가 힐라리우스와 다른 정통파 주교들을 유배시켰을 때, 마르티누스는 니케아 기독교를 단호히 옹호한 것으로 박해에 직면했다. 그는 아리우스파 주교 아욱센티우스에 의해 공개적으로 채찍질당하고 밀라노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리구리아 해의 갈리나리아 섬으로 은퇴하여 힐라리우스가 돌아올 때까지 은둔자로 살았다.

360리귀제 수도원 설립

힐라리우스와 재회한 후 마르티누스는 푸아티에 근처 리귀제에 갈리아 최초의 수도원을 설립했다. 이 공동체는 관상적 기도와 적극적 자선을 결합한 서방 수도원주의의 모범이 되었다. 제자들은 그의 성스러움과 기적에 이끌려 모여들었다. 리귀제 수도원은 오늘날에도 존속하여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 중 하나이다.

371투르 주교로 선출되다

투르 사람들은 마르티누스를 주교로 원했지만 그는 수도원을 떠나기를 꺼렸다. 전설에 따르면, 시민들은 병든 여자를 방문해 달라고 속여 그를 붙잡아 대성당으로 데려갔다. 일부 주교들은 그의 거친 외모가 적합하지 않다고 반대했지만, 압도적인 대중의 지지로 그의 선출이 확정되었다.

372마르무티에 수도원 설립

수도 생활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었던 마르티누스는 투르 맞은편 루아르 강 건너에 마르무티에를 설립했다. 수도원은 동굴과 나무 오두막에 사는 80명의 수도사를 수용할 정도로 성장했으며, 엄격한 청빈과 기도의 규칙을 따랐다. 이 수도사들 중 많은 이가 후에 스스로 주교가 되어 마르티누스의 영향력을 갈리아 전역에 퍼뜨렸다.

376이교 신전을 파괴하다

주교로서 마르티누스는 교구에서 이교를 근절하는 강력한 운동에 착수했다. 그는 직접 원정대를 이끌고 시골 곳곳의 이교 신전, 신성한 나무, 우상 사당을 파괴했다. 시골 이교도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지만, 그의 두려움 없는 신앙과 보고된 기적들이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설득했다.

385프리스킬리아누스 논쟁

스페인 주교 프리스킬리아누스가 이단과 마술 혐의로 고발당했을 때, 마르티누스는 황제 앞에서 그를 변호하기 위해 트리어로 갔다. 마르티누스는 프리스킬리아누스의 가르침에 반대했지만, 세속 권력이 종교적 범죄로 사람을 처형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항의했다. 그의 도덕적 권위로 절차가 일시적으로 연기되었지만, 프리스킬리아누스는 결국 처형되었다.

386프리스킬리아누스파 처형에 항의하다

프리스킬리아누스가 처형된 후 마르티누스는 사형을 지지한 주교들과의 교제를 거부했다. 종교적 박해에 반대하는 그의 원칙적 입장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것이었으며, 후대 교회 가르침의 발전을 예고했다. 그는 결국 교회 일치를 위해 교제를 회복했지만, 이 타협을 죽을 때까지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392마지막 선교 여행

고령에도 불구하고 마르티누스는 이교도 전도, 교회 설립, 교회 분쟁 해결을 위해 갈리아 전역을 계속 여행했다. 전기 작가 술피키우스 세베루스는 병자 치유, 악령 추방,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포함한 이 여행 중의 수많은 기적을 기록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사목 활동은 여러 세대의 중세 주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397캉드에서 선종

마르티누스는 397년 11월 8일 캉드에서 성직자 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사목 방문 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비밀리에 배로 투르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많은 군중이 장례식에 모였다. 투르의 그의 무덤은 중세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순례지 중 하나가 되었으며, 그의 안장일인 11월 11일은 성 마르티누스의 날로 기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