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적인 군 출신 권위주의 지도자로서 인도네시아의 신질서를 구축해 안정과 성장을 이끌었지만, 그 이면에는 깊은 억압과 부패가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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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여정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욕야카르타 인근 케무수크에서 태어나 가난과 불안정 속의 농촌 자바 사회에서 성장했다. 친척 손에서 지내는 시기도 있었고, 자바의 사회적 위계와 관습을 체득하며 훗날 경계심 많은 정치적 스타일의 밑바탕을 형성했다.
젊은 시절 네덜란드 식민 통치 말기의 지역 치안 및 행정 업무에 들어가 규율과 인맥을 쌓았다. 이 경험은 치안 통제 방식과 관료 사회에서 후견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익히게 했다.
일본 점령 기간 일본이 후원한 군사 조직에서 훈련과 복무를 했고, 이 부대들은 전후 인도네시아 군대로 이어졌다. 그는 이 시기에 조직 운영 전술과 제국이 붕괴하는 상황에서 무력 지휘가 갖는 정치적 영향력을 배웠다.
수카르노와 모하마드 하타가 독립을 선포한 뒤, 네덜란드의 재진입에 맞서 싸운 공화파 세력에 합류했다. 그는 현장 장교로서 명성을 쌓았고, 압박 속에서 외교와 무력, 지역 동맹을 조율하는 법을 익혔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승인한 뒤 정식 인도네시아 국군에 편입됐다. 유격전에서 상비군으로의 전환은 정치화된 장교단 안에서 그의 승진 기반이 됐다.
수카르노가 지도민주주의로 기울면서 군은 정치와 경제에서 역할을 확대했다. 그는 핵심 지휘직을 맡아 기업과 지역 엘리트와의 연결을 키웠고, 훗날 완성할 군부 기반 통치 모델의 전조를 보였다.
만달라 사령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서이리안 문제를 두고 네덜란드를 압박하기 위한 준비를 총괄했다. 이 작전은 그의 전국적 위상을 높였고, 군사적 উদ্যোগ이 상위 정치 목표에 봉사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자카르타에 본부를 둔 정예 기동군인 육군 전략예비대의 사령관이 되어 정치 중심지 인근에서 신속 대응 권한을 확보했다. 이후 국가적 위기가 폭발하고 지휘 통제가 모든 것을 좌우할 때 이 자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구월 삼십일 사건으로 여러 장군이 살해된 뒤 그는 신속히 자카르타를 장악하고 군의 작전 통제권을 주장했다. 그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배후로 지목하며 위기를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협으로 규정했다.
삼월 십일 그는 치안을 회복한다는 명분 아래 광범위한 권한을 넘기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슈페르세마르 문서를 수카르노로부터 받아냈다. 그는 이를 이용해 공산당을 금지하고 반대파를 숙청하며 정부 전반에서 수카르노의 측근들을 밀어냈다.
인도네시아 의회는 수카르노를 실권에서 공식적으로 배제하고 그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하며 신질서의 출범을 알렸다. 그는 자신을 안정의 제공자로 내세우는 한편, 민간 제도 속에서 군의 중심적 역할을 공고히 했다.
대통령으로 취임해 규율 있는 기술관료 경제팀을 후원하고 외국인 투자와 원조를 적극 유치했다. 정권은 혼란 이후 질서를 약속했지만, 감시와 검열, 정치적 제한도 함께 확대했다.
신질서의 첫 선거에서 정부가 후원한 골카르 조직이 강한 국가 압력 아래 압승했다. 이 결과는 관리된 선거를 제도화해 대통령직이 경쟁적 정당 정치로부터 차단되도록 만들었다.
포르투갈의 철수와 현지 갈등 이후 그는 동티모르 침공을 승인하며 반공 안정화로 포장했다. 점령은 장기적 저항을 불러왔고 심각한 인권 침해와 지속적인 국제적 비난을 초래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그의 가족과 측근들은 금융, 건설, 천연자원 전반에 걸친 거대한 이해관계를 축적했다. 군과 연계된 재단과 인허가 체계는 공적 자산과 사적 부를 뒤섞어 부패를 국가 운영의 일부로 고착시켰다.
아시아 금융 위기로 루피아가 붕괴하면서 취약한 은행과 연고주의적 부채가 드러났고 국제통화기금은 개혁을 요구했다. 학생 시위와 도시 소요가 확산됐으며 물가 상승과 정당성 붕괴 속에 엘리트의 지지가 갈라졌다.
오월 이십일 그는 사임하고 부통령 바하루딘 유수프 하비비에게 권력을 넘겼으며, 자카르타의 유혈 사태 이후에도 시위는 계속됐다. 그의 퇴진은 개혁 시대로 이어져 언론 자유, 경쟁 선거, 과거 인권 침해에 대한 조사 요구가 확산됐다.
퇴임 이후 검찰은 국가 재단과 가족 재산에 연계된 대형 부패 사건들을 추궁했다. 법원은 그의 건강을 이유로 절차를 반복적으로 중단했고, 이는 개혁 이후에도 처벌 회피와 불균등한 책임 추궁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키웠다.
수년간 건강이 악화된 끝에 페르타미나 병원에서 사망했으며, 국가적 예우와 함께 그의 유산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다. 많은 이들이 안정과 개발을 공로로 꼽았지만, 다른 이들은 억압과 부패, 그리고 1965~1966년의 대규모 학살을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