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팅
현명공 야로슬라프

현명공 야로슬라프

키예프 대공

채팅 시작

AI 성격

간략 정보

루스카야 프라우다 편찬
성 소피아 대성당 건설
키예프 루스 확장

야로슬라프의 지혜: 루스를 확장하고, 법전을 편찬하고, 황금시대를 건설했다.

대화 시작하기

인생 여정

978블라디미르 대공의 아들로 탄생

야로슬라프는 978년경 블라디미르 1세와 폴로츠크의 로그네다 사이에서 태어난 많은 아들 중 하나였다. 로그네다는 블라디미르가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후 강제로 취한 여인이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상태로 태어났을 가능성이 있는 야로슬라프는 최고 권력의 후보자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지성과 결단력이 위대함으로 이끌 것이었다.

988루스의 세례를 목격

어린 야로슬라프는 아버지 블라디미르가 키예프 루스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중대한 결정을 목격했다. 이 사건은 그의 세계관을 깊이 형성했다. 성인이 되어 개종한 아버지와 달리 야로슬라프는 기독교인으로 자랐고, 정교회 신앙은 문명화된 루스에 대한 그의 비전의 핵심이 되었다.

990로스토프 공작에 임명

블라디미르는 어린 야로슬라프를 먼 북동쪽 공국인 로스토프의 공작으로 임명했다. 여기서 그는 행정의 기술을 배우고 학문과 건설에 대한 평생의 헌신을 시작했다. 로스토프는 변방이었지만 야로슬라프가 통치하는 곳은 어디든 변화시킬 것이었다.

1010노브고로드 공작에 취임

야로슬라프는 바이킹과 강한 연결을 가진 주요 교역 중심지이자 부유하고 강력한 공국인 노브고로드로 이동했다. 이 임명은 블라디미르의 아들들 사이에서 그의 중요성이 높아졌음을 나타냈다. 노브고로드의 부와 독립적인 시민들은 앞으로의 투쟁에서 중요한 동맹이 될 것이었다.

1014아버지 블라디미르에 대한 반란

야로슬라프는 노브고로드가 키예프에 바쳐야 할 2000 그리브나의 공물 지불을 거부하여 사실상 늙은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블라디미르는 반항적인 아들을 정벌할 군대를 준비했지만, 부자가 전장에서 만나기 전에 죽음이 개입했다.

1015블라디미르의 죽음과 형제들의 살해

블라디미르는 1015년 7월에 사망했고, 야로슬라프의 형제 스뱌토폴크가 키예프를 장악하여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형제 보리스와 글레브를 살해했다고 전해진다. 이 살인은 기독교 루스를 충격에 빠뜨렸다. 노브고로드에서 안전하던 야로슬라프는 복수와 정당한 계승의 수호자가 되었다.

1016류베치 전투 승리

노브고로드인과 바이킹 용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야로슬라프는 류베치 전투에서 스뱌토폴크를 격파했다. 승리는 스뱌토폴크를 망명으로 몰아넣고 야로슬라프에게 키예프의 통제권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형제는 폴란드 동맹군과 함께 돌아올 것이었고, 내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018패배와 망명

스뱌토폴크는 장인인 폴란드 왕 볼레스와프 1세와 대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야로슬라프는 부그 강에서 패배하고 노브고로드로 도망쳐야 했다. 스칸디나비아로의 도주를 고려했지만, 노브고로드 시민들이 그의 뒤에 결집하여 도주를 막기 위해 배를 부수고 새 군대를 위한 자금을 모았다.

1019알타 강에서의 최종 승리

야로슬라프의 군대는 보리스가 살해된 곳 근처인 알타 강에서 스뱌토폴크와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전투는 치열했고 야로슬라프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스뱌토폴크는 도주 중에 죽었는데, 미쳐버렸다고 전해진다. 야로슬라프는 이제 의심할 여지 없는 키예프 대공이 되었지만, 도전은 남아 있었다.

1021스웨덴과의 혼인 동맹

야로슬라프는 스웨덴 왕 올로프의 딸 잉게게르드와 결혼하여 스칸디나비아와의 유대를 강화했다. 이 결혼은 스웨덴 고문관과 전사들을 키예프로 데려왔고, 키예프 루스를 유럽의 거의 모든 왕가와 연결시킬 왕조 결혼 정책을 시작했다.

1024형제 므스티슬라프와의 갈등

야로슬라프의 형제 트무타라칸의 므스티슬라프가 그의 패권에 도전했고, 형제들은 리스트벤에서 전투를 벌였다. 야로슬라프는 패배하고 권력을 나눠야 했다. 므스티슬라프는 체르니고프에서 동부를 통치하고 야로슬라프는 키예프와 서부를 유지했다. 이 실용적인 타협은 평화를 유지했다.

1036전 키예프 루스 통일

므스티슬라프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야로슬라프는 마침내 전 키예프 루스를 단독 통치하에 통일했다. 같은 해 그는 여러 세대에 걸쳐 루스를 위협해온 페체네그 유목민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그는 웅장한 성 소피아 성당 건설을 시작했다.

1037성 소피아 성당 건설

야로슬라프는 콘스탄티노플의 위대한 교회를 본떠 키예프에 성 소피아 성당 건설을 시작했다. 황금 돔과 놀라운 모자이크를 갖춘 이 비잔틴 건축 걸작은 키예프가 콘스탄티노플 자체에 필적하는 기독교 수도로 부상했음을 상징했다.

1038루스카야 프라브다 편찬

야로슬라프는 키예프 루스 최초의 성문법인 루스카야 프라브다를 공포했다. 이 법전은 피의 복수, 재산권, 사회 관계를 규정하여 부족 관습에서 성문법으로의 중요한 전환을 나타냈다. 이것은 수세기 동안 동슬라브 법의 기초로 남았다.

1043콘스탄티노플에 대한 마지막 공격

상업 분쟁 후 야로슬라프는 아들 블라디미르를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보냈다. 그리스 불이 루스 함대를 파괴하여 원정은 재앙으로 끝났다. 이 실패는 바랑기안 식 해상 습격의 종말을 알리고 키예프 루스를 비잔티움과의 군사적 관계보다 외교적 관계로 이끌었다.

1046키예프 대주교좌 설립

야로슬라프는 힐라리온을 최초의 루스 출신 키예프 대주교로 임명하여 콘스탄티노플로부터의 교회 독립을 주장했다. 힐라리온의 유명한 '율법과 은총에 대한 설교'는 블라디미르의 세례와 야로슬라프의 업적을 기념하며 루스 종교 문학의 전통을 확립했다.

1050왕조가 전 유럽과 연결됨

자녀들의 결혼을 통해 야로슬라프는 류리크 왕조를 유럽의 거의 모든 왕가와 연결시켰다. 딸 안나는 프랑스 왕비가 되었고, 엘리자베스는 노르웨이 왕비, 아나스타시아는 헝가리 왕비가 되었다. 아들들은 비잔틴과 독일 공주들과 결혼했다. 키예프는 진정으로 기독교 유럽의 일부가 되었다.

1054키예프에서 서거

현명한 야로슬라프는 1054년 2월 20일 키예프에서 사망했다. 그는 키예프 루스를 부족 연맹에서 성문법, 웅장한 교회, 전 유럽과의 연결을 갖춘 문명화된 기독교 국가로 변모시켰다. 후계자들이 다투고 그의 영토를 분열시키겠지만, 그의 문화적 업적은 지속되었다. 그는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공경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