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산 왕조의 마지막 군주로서, 아랍-이슬람 군대가 고대 제국 질서를 해체해 가는 가운데 이란을 지키려 분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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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여정
비잔티움과의 전쟁과 파벌 폭력 이후 제국 권위가 흔들리던 시기에 사산 왕가에서 태어났다. 경쟁하는 귀족과 장군들이 궁정 정치를 좌우하며, 불안과 변덕스러운 동맹 속에서 어린 시절이 형성되었다.
호스로 2세가 축출된 뒤, 잇따른 즉위와 암살이 왕권과 국고를 크게 흔들었다. 권력은 파르시그와 팔라브 같은 유력 귀족 가문으로 이동했고, 어린 왕자는 엘리트들의 경쟁 속 말판의 말이 되었다.
수년간의 혼란 끝에 정통성을 내세울 사산 왕가의 상징을 찾던 유력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관료와 거물 귀족들이 그의 이름으로 국정을 운영하며, 통일된 제국 지휘권을 행사할 여지는 제한되었다.
초기 라시둔 칼리프국의 침입이 이라크 변경을 시험하자, 사산은 동원에 어려움을 겪었다. 지역 지휘관들이 분산적으로 방어하는 동안, 왕실은 물자 부족과 지방 엘리트들의 흔들리는 충성에 직면했다.
사산군은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와 연관된 군대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해, 제국 중심지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이 패배는 중앙 지도력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고 지방의 이탈을 가속했다.
아랍-이슬람 군대가 크테시폰에 입성해 사산 정통성을 상징하던 궁정의 보물과 행정 중심지를 장악했다. 야즈데게르드는 보다 안전한 동부 지역으로 물러나 총독과 귀족 가문들의 보호와 재정에 의존했다.
내륙의 거점에서 남은 군단장들과 지방 통치자들을 조정해 일관된 방어 체계를 구축하려 했다. 그러나 거물들 사이의 경쟁과 이라크로부터의 거리 탓에 통일된 전략은 어려웠고, 협상으로 얻는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후제스탄과 메디아의 주요 도시들이 차례로 넘어가며 세수와 병력이 붕괴했다. 이동하는 궁정은 긴급 부과와 지역 유력자들의 서약에 의존했으나, 그들은 대개 자신의 생존을 우선시했다.
사산의 대규모 연합군이 나하반드에서 패배하며 서부 회복의 희망이 크게 꺾였다. 이후 많은 요새와 도시들이 항복을 협상하며 새로 형성된 힘의 균형을 인정했다.
상징적·물자적 지원을 기대하며 사산 정체성이 강했던 파르스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지방 권력자들은 정복자와의 타협과 값비싼 저항, 그리고 내부 파벌 갈등 사이에서 계산을 거듭했다.
아랍-이슬람 세력의 진격으로 왕권의 마지막 일관된 기반이 무너져, 더 동쪽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야즈데게르드는 점차 명령이 아닌 호소를 내놓게 되었고, 총독들은 자율적으로 행동하며 제각기 조건을 협상했다.
독자적 방어에 익숙한 변경 주들로부터 병력과 자금을 모으기 위해 이란 남동부를 이동했다. 왕의 이름이 지닌 권위에도 불구하고, 빈약한 자원과 지역 경쟁이 동원 규모를 제한했다.
끝없는 압박 속에서 이란 밖의 동맹을 모색하며, 트란스옥시아나의 통치자들과 튀르크계 세력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거리, 이해관계의 충돌, 그리고 정복의 속도 때문에 외교는 즉각적인 군사적 구원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메르브는 행정의 잔존 세력과 충성파가 모이는 마지막 거점이 되었지만, 지역 엘리트들은 저항 지속을 두고 분열되어 있었다. 자원이 고갈되면서 야즈데게르드의 입지는 지역 지휘관과 재정 후원자들의 호의에 좌우되었다.
믿을 만한 보호를 잃은 뒤, 도주 중 지방의 배신이 개입되었다고 전해지는 정황 속에서 살해되었다. 그의 죽음은 사산 왕권의 종말을 알렸지만, 이란 문화는 새로운 지배자와 왕조 아래에서도 지속되었다.
후대 페르시아 사학은 그를 4세기에 걸친 제국 시대를 닫은 마지막 황제로 기억했다. 그의 이야기는 충성, 귀족 분열, 그리고 이란이 이슬람 통치로 이행하는 전환기를 논하는 창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