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맞서 싸웠으나, 배신과 도주 속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붕괴를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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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여정
아케메네스 귀족층에서 아르타샤타로 태어나 사트라프들 사이의 경쟁과 궁정 음모 속에서 성장했다. 제국은 아나톨리아에서 중앙아시아까지 뻗어 있었고, 끊임없는 군사적 대비와 외교가 요구되었다.
젊은 귀족으로서 카스피 해 인근에서 카두시아이 원정에 참여해 용맹으로 주목받았다고 전해진다. 궁정은 전장에서 쌓은 명성을 중시했으며, 이는 그를 신뢰받는 왕실 지휘관 대열에 올려놓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제국 행정의 중심에서 사트라프, 왕족, 환관 관료들이 영향력을 두고 다투는 현장을 경험했다. 이 시기는 왕위 계승의 취약성과 지방 권력 중개자들의 충성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체감하게 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죽은 뒤, 유력 궁정인 바고아스는 왕을 세우고 내리며 왕좌를 좌지우지했다. 잦은 왕의 교체는 깊은 불안정을 드러냈고, 마케도니아의 외부 위협 앞에서 제국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다.
타협안으로 선택된 그는 바고아스와 불안한 사트라프들이 장악한 궁정 속에서 ‘왕중왕’이 되었다. 그는 바고아스에게 독을 마시게 해 죽게 함으로써 왕을 만드는 자의 지배를 끝내고 독립성을 과시했다.
수년간의 쿠데타와 암살 이후, 주요 사트라프들의 충성을 확보하고 신뢰를 회복하려 힘썼다. 마케도니아의 부상에 대비해 각 지방에서 보고와 공납, 징발이 왕실 중심으로 모였고, 그는 다가올 충돌을 준비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소아시아로 건너오자 페르시아 지휘관들은 그라니코스에서 그를 막으려 했으나 성과는 엇갈렸다. 이 침공은 다리우스가 내부 수습에서 제국 전역의 동원과 전략 수립으로 급히 전환하도록 만들었다.
다리우스는 이수스 인근에서 알렉산드로스와 맞섰지만, 좁은 지형 때문에 페르시아의 수적 우위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패주 속에서 그의 야영지와 가족이 포로가 되었고, 그는 재정비를 위해 달아나야 했는데 이는 제국 전반의 왕권 위신에 큰 타격이었다.
그는 몸값, 영토 양보, 혼인 동맹을 제안하며 평화와 친족의 귀환을 얻어내려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거절하고 포로가 된 왕실을 이용해 정통성을 과시하며 페르시아 동맹자들에게 압박을 가했다.
다리우스는 메디아, 박트리아 등 동방 지역에서 병력을 끌어모아 기병과 보병, 동맹 부대를 편성했다. 모집 규모는 제국의 막대한 자원을 보여주었지만, 언어와 지휘 체계, 보급을 조율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가우가멜라 인근 평원에서 다리우스는 넓은 전장을 택하고 낫 전차와 대규모 기병을 배치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규율 잡힌 기동이 페르시아 중앙을 무너뜨렸고, 협동된 마케도니아 공격 속에 전열이 붕괴하자 그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가우가멜라 이후 바빌론은 문을 열어 알렉산드로스를 맞이했고, 다리우스는 주요 행정·경제 거점을 잃었다. 이 항복은 다른 도시와 사트라프들의 이탈을 부추겨, 중앙집권적 통제의 붕괴를 더욱 가속했다.
그는 엑바타나로 후퇴해 병력을 재정비하고 제국의 보물과 남은 왕권을 지키려 했다. 사트라프들은 저항이 가능한지 논의했지만, 지휘관들이 충성보다 생존을 저울질하면서 균열은 더 커졌다.
박트리아의 사트라프 베수스와 다른 귀족들은 동쪽으로 도주하던 다리우스를 체포해, 알렉산드로스와의 협상 카드로 삼거나 왕위를 주장하려 했다. 이 사건은 패배가 충성을 값비싼 선택으로 만들 때 제국의 결속이 얼마나 빠르게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박트리아로 옮겨지는 도중, 알렉산드로스의 군대가 다가오자 다리우스는 포로로 잡아둔 자들에게 치명상을 입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후 그를 쓰러진 경쟁자로 예우하고 베수스를 추격했으며, 정복을 왕살해에 대한 응징으로 규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