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인을 처음 격파한 러시아인. 모스크바를 통일하고 킵차크 한국을 격파한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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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여정
드미트리 이바노비치는 1350년 10월 12일 모스크바 대공 이반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은 러시아가 킵차크 칸국의 지배 아래 있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불과 아홉 살에 드미트리는 아버지의 죽음 후 모스크바 대공이 되었다. 수도대주교 알렉시우스가 그의 미성년 기간 동안 섭정으로 봉사했다.
드미트리는 수즈달 대공 드미트리 콘스탄티노비치의 딸 예브도키야와 결혼하여 러시아 공국들 사이에서 모스크바의 위치를 강화했다.
드미트리는 목조 성벽을 대체하여 모스크바의 크렘린을 백석으로 재건했다. 이 요새는 러시아 권력의 영원한 상징이 될 것이었다.
드미트리는 리투아니아 대공 알기르다스의 침략으로부터 모스크바를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러시아 땅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다.
러시아군은 피아나 강에서 타타르 습격자들에게 기습 패배를 당해 몽골 지배에 도전하려는 드미트리의 계획이 일시적으로 좌절되었다.
드미트리는 보자 강에서 타타르에 대한 러시아의 첫 주요 승리를 거두어 몽골군이 야전에서 패배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보자 전투 후 마마이 칸은 러시아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소집했다. 드미트리는 결정적인 대결을 준비했다.
대전투 전에 라도네시의 성 세르기우스가 드미트리의 군대를 축복하고 두 명의 전사 수도사를 그와 함께 싸우도록 보냈다.
1380년 9월 8일 드미트리는 러시아군을 이끌고 마마이의 타타르 군대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몽골의 군사적 위신을 무너뜨렸다.
드미트리는 보야르와 갑옷을 바꿔 입고 최전선에서 싸웠다. 전사자들 사이에서 부상당한 채 발견된 그의 개인적 용기는 전설이 되었다.
드미트리가 병력을 모으러 떠난 사이 토흐타미시 칸이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약탈했다. 이 재앙은 러시아 권력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드미트리는 모스크바를 재건하고 칸국에 조공을 재개했지만 러시아 공국들 사이에서 모스크바의 성장하는 우위를 유지했다.
드미트리는 모스크바의 왕위가 몽골의 임명이 아닌 장자 상속에 의해 그의 후손에게 전해지는 선례를 확립했다.
드미트리는 1389년 5월 19일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바실리 1세가 그를 계승하여 러시아 통일을 향한 모스크바의 부상을 계속했다.
쿨리코보 승리는 러시아 민족 정체성의 핵심이 되어 통합된 러시아군이 억압자들을 물리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드미트리 돈스코이를 성인으로 시성하여 러시아와 정교 신앙을 수호한 그의 역할을 인정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영웅 중 한 명으로 남아 외국 지배에 대한 저항과 러시아 민족의 탄생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