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나를 심판할 수 없다!" 베켓은 왕에 맞서 성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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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여정
토마스 베켓은 런던의 부유한 노르만 상인 길버트와 마틸다 베켓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전직 보안관이었으며 후에 직물 무역에서 성공했다. 어린 토마스는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랐다.
베켓은 서리주의 아우구스티누스 머튼 수도원에서 정규 교육을 시작했다. 수도원은 라틴어, 문법, 종교 연구의 엄격한 교육을 제공했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적 재능을 보였다.
베켓은 교육을 계속하기 위해 파리로 가서 그곳의 명문 학교에서 공부했다. 교회법, 신학, 교양 과목을 배웠다. 이 경험은 그에게 중세 유럽의 지적 흐름을 접하게 했다.
아버지의 파산과 사망 후 베켓은 런던으로 돌아왔다. 친척의 금융업에서 서기와 회계사로 일했다. 이 어려운 시기가 그의 야심찬 성격을 형성했다.
베켓은 서기로서 캔터베리 대주교 시오볼드의 가문에 합류했다. 이 직위가 그의 교회 경력을 시작하게 했다. 시오볼드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후원자가 되었다.
시오볼드 대주교는 베켓을 볼로냐와 오세르로 보내 교회법을 공부하게 했다. 이 명문 학교들에서 교회법 전문 지식을 습득했다. 이 법률 훈련은 나중의 분쟁에서 필수적이 되었다.
베켓은 고위 교회 직책인 캔터베리 부주교로 임명되었다. 행정 능력과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교회 계층에서 그의 지위는 꾸준히 상승했다.
헨리 2세는 베켓을 잉글랜드 최고의 세속 관직인 대법관으로 임명했다. 두 사람은 친밀한 친구가 되었다. 베켓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충실하게 왕을 섬겼다.
베켓은 직접 700명의 기사를 이끌고 헨리의 툴루즈 원정에 참여했다. 용감하게 싸우고 군사적 지도력을 발휘했다. 성직자로서는 이례적인 역할이었으며 왕에 대한 완전한 헌신을 보여주었다.
세속적인 생활 방식에도 불구하고 베켓은 헨리의 추천으로 캔터베리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대주교로 성별되기 하루 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 임명은 두 사람의 운명을 바꾸게 된다.
대주교가 되자 베켓은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대법관직을 사임하고 금욕적이고 경건한 생활을 시작했다. 교회의 이익에 완전히 헌신하여 왕을 경악하게 했다.
베켓은 처음에 클라렌던 헌장을 받아들였다가 나중에 교회 권한을 제한하는 이 법률을 거부했다. 이 반항은 헨리 2세를 격분시켰다. 교회와 왕권의 갈등은 화해 불가능해졌다.
베켓은 노샘프턴 성에서 조작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수도승으로 변장하여 극적으로 잉글랜드를 탈출했다. 교황의 지지를 구하며 6년간의 망명 생활을 보내게 된다.
베켓은 부르고뉴의 시토회 퐁티니 수도원에 피신했다. 고행승처럼 기도와 학문에 전념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헨리에 대항하는 그를 지지했다.
헨리가 시토회를 위협하자 베켓은 교황의 직접 보호 하에 상스로 이동했다. 헨리의 지지자 몇 명을 파문했다. 양측 모두 타협을 거부하여 갈등이 고조되었다.
베켓과 헨리 사이에 여러 차례 화해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만남 때마다 새로운 비난과 요구가 반복되었다. 교황 특사는 필사적으로 평화를 중재하려 했다.
1170년 12월, 부분적인 화해 후 베켓은 캔터베리로 귀환했다. 일반 백성들은 그를 영웅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그는 즉시 헨리 편에 섰던 주교들을 파문했다.
1170년 12월 29일, 네 명의 기사가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베켓을 살해했다. 헨리의 분노에 찬 말이 이 암살을 촉발했다. 베켓의 마지막 말은 '예수의 이름과 교회의 보호를 위해 나는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