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자" 윌리엄: 헤이스팅스의 승자, 잉글랜드 왕, 둠스데이 북의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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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여정
윌리엄은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1세와 무두장이의 딸 에를레바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혼외 출생으로 인해 '서자 윌리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버지가 예루살렘 순례 중 사망하자 겨우 7세의 윌리엄이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다. 그의 유년기는 노르만 귀족들 사이의 폭력과 불안정으로 점철되었다.
어린 윌리엄은 적대적인 귀족들의 여러 차례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다. 그의 후견인 오스베른이 살해되었고, 윌리엄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충성스러운 지지자들에 의해 숨겨져야 했다.
프랑스 왕 앙리 1세의 도움으로 윌리엄은 발에드뉴에서 반란을 일으킨 노르만 남작들을 격파했다. 이 승리로 노르망디 공작으로서의 그의 권위가 확립되었다.
윌리엄은 전략적인 성채 건설과 결혼 동맹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강화했다. 그는 후에 잉글랜드 정복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노르만 군사 체계를 발전시켰다.
사촌인 참회왕 에드워드를 방문하는 동안 윌리엄은 잉글랜드 왕위 계승 약속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 주장은 후에 그의 잉글랜드 침공을 정당화했다.
윌리엄은 가까운 혈연 관계로 교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플랑드르의 마틸다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플랑드르와의 유대를 강화했고, 미래의 왕 2명을 포함해 최소 9명의 자녀를 낳았다.
윌리엄은 바라빌에서 프랑스 왕 앙리 1세가 이끄는 침공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이 승리로 프랑스의 노르망디 제압 시도가 끝나고 윌리엄의 독립이 확보되었다.
후에 잉글랜드 왕이 되는 해럴드 고드윈슨은 성유물 위에서 윌리엄의 왕위 계승권을 지지하겠다고 맹세했다고 전해진다. 이 서약을 어기는 것이 윌리엄의 침공을 정당화했다.
윌리엄은 약 7,000명의 병사로 구성된 침공군을 이끌고 9월 28일 페벤시 만에 상륙했다. 그는 신속하게 야영지와 방어 시설을 구축한 후 내륙으로 진군했다.
10월 14일, 윌리엄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2세를 격파했다. 해럴드는 눈에 화살을 맞아 전사했다고 전해지며, 노르만 침공에 대한 앵글로색슨족의 저항이 끝났다.
크리스마스 날, 윌리엄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 그의 대관식은 잉글랜드에 대한 노르만 지배를 확립하고 잉글랜드 역사의 새 시대를 열었다.
윌리엄은 북상하여 엑서터와 요크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노르만 통제를 확립하고 남아있는 앵글로색슨족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 전국에 성을 건설했다.
지속되는 반란에 대응하여 윌리엄은 잔혹한 작전으로 잉글랜드 북부를 황폐화시켰다. 마을이 파괴되고 농작물이 불태워져 광범위한 기근과 죽음을 초래했다.
윌리엄은 런던탑의 중앙 천수각인 화이트 타워 건설을 시작했다. 이 요새는 노르만 권력을 상징했으며 왕실 거주지와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윌리엄은 이복형제이자 바이외 주교인 오도를 허가 없이 군대를 모집한 혐의로 체포했다. 이는 가족에 대해서도 왕권을 유지하겠다는 윌리엄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 전역의 토지 소유에 대한 포괄적인 조사인 둠스데이 북을 의뢰했다. 이 놀라운 행정적 성과는 그의 왕국의 부와 자원을 기록했다.
윌리엄은 망트 약탈 중 말이 걸려 넘어지면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는 자신이 창건한 캉의 남자 수도원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