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인 정치가 모로: 납치되고, 살해되고, 온 나라가 애도하고, 유산이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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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여정
알도 모로는 남부 이탈리아 도시인 마글리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학교 감시관으로, 그에게 교육과 공공 봉사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심어주었다.
모로는 바리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으며, 그곳에서 가톨릭 학생 단체에 적극 활동했다. 그는 나중에 같은 대학에서 법학 교수가 되었다.
모로는 엘레오노라 키아바렐리와 결혼했으며, 함께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들의 결혼은 그의 죽음까지 지속되었으며, 엘레오노라는 그의 납치 사건 중에 품위의 상징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모로는 기독교민주당의 일원으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30년 이상 지속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모로는 새로운 이탈리아 헌법을 초안한 제헌의회에 선출되었다. 그의 법률 전문성과 도덕적 권위는 이탈리아 공화국의 기본법 형성에 기여했다.
모로는 고향인 아풀리아 지역을 대표하는 의원으로 이탈리아 의회에 선출되었다. 그는 평생 동안 계속해서 재선출되었다.
모로는 아미토레 판파니 정부의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는 그의 첫 번째 주요 내각직이자 그의 법률 전문성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모로는 전후 이탈리아의 지배적 정치 세력인 기독교민주당의 정치 서기장이 되었다. 이 직책은 그를 이탈리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모로는 이탈리아의 총리가 되었으며, 이탈리아 역사에서 처음으로 사회당을 포함한 중도좌파 연립 정부를 이끌었다.
모로는 두 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했으며, 중도좌파 실험을 계속하고 상당한 사회 및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모로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총리직을 사임했지만, 학생 시위와 사회 불안이 유럽 전역을 휩쓸면서 이탈리아 정치의 지배적 인물로 남았다.
모로는 심각한 경제 위기와 '납탄의 해'로 알려진 정치적 폭력의 시대 동안 세 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했다.
모로는 총리직에서 물러났지만 이탈리아 정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계속 활동했으며, 공산당과의 '역사적 타협' 전략을 추진했다.
모로는 기독교민주당 총재가 되었으며, '역사적 타협'으로 알려진 공산당의 지지를 받는 정부 수립을 위한 협상을 계속했다.
1978년 3월 16일, 모로는 적색여단 테러 조직에 의해 납치되었다. 공격 중에 그의 5명의 경호원이 살해되었다. 그는 협상이 실패하는 동안 55일간 감금되었다.
55일간의 감금과 협상 실패 후, 알도 모로는 1978년 5월 9일 적색여단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의 시신은 기독교민주당 본부와 공산당 본부 사이에 상징적으로 배치된 자동차 내에서 발견되었다.